왜 자꾸 피하고 거부하게 된 걸까. 어째서 더 솔직하게 반응하지 못하게 된 걸까. ‘이게 내 성향이고 진심인데 얘기하면 뭐라고 할 테니 안 해야지.’ ‘아무렇지도 않은 척 덜 진지하게 해야지.’ 진지병, 설명충이라는 진중함을 낮추는 말에서 ‘진지함’에 대한 거부감은 더욱 켜졌고 자신을 밋밋하게 깎아가는 사람이 많아졌다. 그것이 정말 소중한 것인데도 말이다. 시간이 꽤 지난 강연임에도 여전히 댓글로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 보였다.

스스로 별로라고 느끼는 것에는 정말 문제가 있어서 고쳐야 할 점과 남들이 보기에 그저 멋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. 멋지지 않은 모습이라 하면 무언가 과잉되어 있어서 남들 눈에 거슬리거나 지적을 받을 수 있는데, 바로 유난스러워 보이는 그것에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. 나조차 아직 모르는 나의 재능과 연결될 수 있다.

남자로서 매력이 없는 사람도 자신만의 감수성으로 여자보다 여자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곡을 잘 쓰기도 한다. 평소 매력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해도 그 사람의 그런 면에 있었던 여성적인 감수성이 그 사람의 재능이었던 것이다.

20대부터 자신을 ‘다림질’하기 시작하면 무난하고 적당하게 사람 좋다는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어딘가에 꼭 필요한 사람은 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. 그러니 이른 나이에 주변을 너무 의식해 지금 가진 자신만의 소중한 재료들을 없애지 말아야 할 것이다. 지금 별로인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내 개성과 장점을 증명해주는 재료가 될 수 있다.

유난스럽다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면 상대에게 애매한 수치심을 주게 된다. 그런 무안한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내면의 목소리를 억누르게 되는 것이다. 어떤 모습이든 지적받은 것 안에는 그 사람만의 특별함이 담겨 있다. 유난스러우면 어떻고 진지하면 어떤가. 또 다른 가능성이자 특별함으로 그 나름 빛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. 그러니 무엇이든 내면의 특별한 구석인 자신의 유난스러움을 지켜가 봐도 좋은 것 아닐까.

참고

1) <20대가 겪는 진지함에 대한 거부감.jpg>, 웃긴대학 (링크), 개드립 (링크)

2) [청페강연] <찌질한 나를 사랑하는 법 – 김이나>, 마이크 임팩트 (링크)

3) 이미지 <kbs2 동백꽃 필 무렵> (링크)

Written by LAJ